에베레스트
오늘은 유난히 하늘이 파랗다. 어렸을 적에 난 하늘의 파란 색이 물감이거나, 페인트이거나, 혹은 그도 아니라면 하늘의 누군가가 찔러 죽인 푸른 괴물의 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이가 먹고, 학교에 가게 되면서 나의 망상은 그저 태양으로부터 오는 광선과 공기 중의 무수한 물질들과의 산란작용이였음으로 판결이 내려지고, 그 판결에 대한 항소도 제대로 한번 해보지 못한 채 그렇게 내 유년기는 끝이 났다. 매우 일반적이고, 별다른 생각의 여지를 남기지 않은 채 그렇게 내 유년기는 모두가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함의에 의해, 혹은 진리라는 미명하에 적막할 정도로 한번의 논의도 없는 결론만으로 그렇게 종말을 맞이했다.
그날도 그렇게 하늘은 파란 색으로 날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바라본 하늘은 유난히 밝은 코발트빛이었다. 그때서야 생각이 났다.
'푸른 괴물의 피라니, 엄청난 생각이었군.'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내내 그 생각으로 웃음이 났다. 만약 어린 시절의 나를 지금의 내가 만난다면 상처를 주고 말겠지만, 그래도 좋으니 딱 한번만 그 시절의 나를 지금의 내가 만나봤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해버렸다. 그게 전부였다. 그날 내 머리 속을 맴돌던 이미지들이란 것들은 모조리 다 어린 시절의 그것들이었다. 추억을 곰씹는다는 표현을 몰랐던 것인지 혹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인지, 지금 생각해보면 그저 어린시절을 추억했던 것뿐인데, 그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길은 10분여의 거리다. 어느 동네에나 있을 법한 구멍가게, 혹은 담배가게가 있고, 만두집을 지나면 어설픈 미용실이 있다. 미용실이라고는 하지만 어쩐지 미장원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듯한 그런 곳이었다.
여기까지 걷고서야 어딘가 모를 위화감이 들었다. 무엇이 이유였던 것일까. 한동안 멍하니 그 미용실 앞에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더 걸었다간 내가 나를 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저 걸음을 뗄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일까. 담배라도 피워볼까하는 생각에 주머니에 손을 넣었을 때, 내 손에 담배 대신 유리구슬 몇 알이 짚혔을 때, 7-11 대신 유씨 할머니의 구멍가게와 만두집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때 난 내가 내가 아님을,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 하자면 현재의 내가 아닌 과거의 나, 혹은 그 과거의 누군가가 되어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만두집 아들이었던 정훈이와 미장원집 아들이었던 인수가 내 손을 잡고 유씨 할머니의 구멍가게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며 그들에게 난 누군가 다른 사람으로 보일 것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들에게 나를 알려야 할 것인가, 그저 모른척 지나갈 것인가가 아니라, 일단 내가 누구인가에 있었다.
"너 새로 이사왔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나도 모르는 누군가 새로운 사람으로 보이고 있었고, 최소한 그들은 나에게 적대감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어, 어. 나 새로 이사왔어. 저기 언덕 위에 파란 지붕인 집으로..."
대충 둘러대기는 했지만, 분명히 그 집엔 내가 기억하기로 사람이 드나드는 법이 없었다. 순간적인 반응치고는 꽤나 쓸만한 것이었다고나 할까.
"이야, 그 파란 지붕 집이구나. 올라다니기 힘들겠다."
"그, 그런가? 난 워낙 그렇게 높이 있는 집에만 살아서..."
"우와, 그럼 넌 걷는게 하나도 안 힘들어?"
"달리기 진짜 잘하겠다."
"달리기랑 무슨 상관이냐. 넌 나중에 에레베스트, 에베레스튼가, 하여튼 그 산 올라가면 되겠다."
"그, 그래."
"나도 에베레스트에 꼭 가보고 싶은데."
그 시절의 내가 에베레스트에 가고 싶었는지 그때서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내가 내 입으로 내 머리 속에 들어있는 에베레스트에 대한 소망을 이야기하는데 어쩜 그리 이질적일 수가 있는 것인지.
"에베레스트엔 왜 가고 싶은데?"
"그러니까, 에베레스트에 올라가면 하늘에 뿌린 물감을 퍼올 수 있을 것 같아서. 미술 시간에 그림을 그려도 파란 하늘만은 내 마음대로 그려지지가 않아. 그래서."
"파란 하늘?"
"어, 하늘. 저 하늘색은 내 물감엔 없어. 이름도 모르겠고. 그래서 직접 가서 떠올려고."
"하늘은 물감으로 되어있는 거야?"
"아닌가? 난 그런줄 알았는데. 아니야?"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데. 아, 내가 들은 이야기가 있어."
"뭔데?"
하늘은 원래는 파란색이 아니었데. 흰색이었다는 거야. 생각해봐. 밤의 하늘은 까만색이잖아. 그래서 밤의 반대인 낮의 하늘은 하얀색이었데. 하얀색 하늘은 떼가 잘 타긴 했지만, 그래도 하늘에는 그 하얀 하늘은 언제나 깨끗하게 닦아주는 청소부가 있어서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는거야. 다행스런 일이지.
그러던 어느날 세상 사람들을 괴롭히던 푸른 괴물이 이 청소부를 잡아갔다나봐. 깨끗한 하늘을 볼 수 없게 하려고 그랬겠지.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하늘은 점점 지저분해져 가다가 결국엔 낮이랑 밤이 구분 안될 정도로 까맣게 떼가 묻었데. 사람들은 걱정만 하다가 결국엔 그 파란 괴물을 물리치고 청소부를 데려올 용사를 찾았고, 바다 건너 먼 섬에 사는 한 청년이 자원했다나봐. 그 청년은 사람들이 만들어준 날개를 달고 하늘로 날아가서는 푸른 괴물이 숨어있던 까만 동굴 속으로 들어가서 단칼에 괴물의 목을 베고 청소부를 구했지. 그런데 푸른 괴물은 죽어 가면서 마지막 힘을 다해 청소부를 낚아챘고, 괴물의 손아귀에 잡힌 청소부는 숨이 막혀 죽었다는 것이야. 그때 괴물이 흘린 피가 하늘에 온통 뿌려져서 하늘은 파란 색으로 변했데. 그리고 청소부의 빈 자리는 그 청년이 대신 했고. 그런데 청년은 청소에 서툴러서 가끔씩 지저분한 떼자국을 남기기도 했는데 그게 구름이래.
"우와, 그런거야?"
"그럼 하늘에 있는 파란색은 물감이 아니라 괴물의 피네?"
"글쎄, 나도 들은 얘기니까. 그러면 니가 나중에 어른이 되서 에베레스트에 올라갔을 때 확인해 줄래?"
"그래. 그럴께. 내가 꼭 피인지, 물감인지 알아봐줄께."
"고마워."
"베이스캠프, 베이스캠프, 여기는 E1, 들리나?"
"E1, E1, 여기는 베이스캠프, 아주 잘 들린다."
"베이스캠프, 바람도 없고 오늘은 정상까지 올라가겠다."
"E1, 그래도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조심하기 바란다."
"롸저."
하늘의 파란 색은 물감일까, 푸른 괴물의 피일까. 모범답안이 무엇인지는 이미 아주 오래 전에 알아 버렸다. 빛과 물질들의 산란 작용에 의해서 생긴 현상일 뿐이다. 하늘의 어디에도 피는 커녕 물감의 흔적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이곳의 정상에 있는 저 하늘만은 컵으로 잘 떠서 담아 올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그게 물감이었던, 파란 괴물의 피가 되었던.
'오늘따라 잘 닦아 놨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