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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레스트
2006/08/04 11:39 | anakin wonderland | Permanent link

에베레스트

 

 

오늘은 유난히 하늘이 파랗다. 어렸을 적에 난 하늘의 파란 색이 물감이거나, 페인트이거나, 혹은 그도 아니라면 하늘의 누군가가 찔러 죽인 푸른 괴물의 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이가 먹고, 학교에 가게 되면서 나의 망상은 그저 태양으로부터 오는 광선과 공기 중의 무수한 물질들과의 산란작용이였음으로 판결이 내려지고, 그 판결에 대한 항소도 제대로 한번 해보지 못한 채 그렇게 내 유년기는 끝이 났다. 매우 일반적이고, 별다른 생각의 여지를 남기지 않은 채 그렇게 내 유년기는 모두가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함의에 의해, 혹은 진리라는 미명하에 적막할 정도로 한번의 논의도 없는 결론만으로 그렇게 종말을 맞이했다.
그날도 그렇게 하늘은 파란 색으로 날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바라본 하늘은 유난히 밝은 코발트빛이었다. 그때서야 생각이 났다.
'푸른 괴물의 피라니, 엄청난 생각이었군.'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내내 그 생각으로 웃음이 났다. 만약 어린 시절의 나를 지금의 내가 만난다면 상처를 주고 말겠지만, 그래도 좋으니 딱 한번만 그 시절의 나를 지금의 내가 만나봤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해버렸다. 그게 전부였다. 그날 내 머리 속을 맴돌던 이미지들이란 것들은 모조리 다 어린 시절의 그것들이었다. 추억을 곰씹는다는 표현을 몰랐던 것인지 혹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인지, 지금 생각해보면 그저 어린시절을 추억했던 것뿐인데, 그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길은 10분여의 거리다. 어느 동네에나 있을 법한 구멍가게, 혹은 담배가게가 있고, 만두집을 지나면 어설픈 미용실이 있다. 미용실이라고는 하지만 어쩐지 미장원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듯한 그런 곳이었다.
여기까지 걷고서야 어딘가 모를 위화감이 들었다. 무엇이 이유였던 것일까. 한동안 멍하니 그 미용실 앞에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더 걸었다간 내가 나를 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저 걸음을 뗄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일까. 담배라도 피워볼까하는 생각에 주머니에 손을 넣었을 때, 내 손에 담배 대신 유리구슬 몇 알이 짚혔을 때, 7-11 대신 유씨 할머니의 구멍가게와 만두집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때 난 내가 내가 아님을,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 하자면 현재의 내가 아닌 과거의 나, 혹은 그 과거의 누군가가 되어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만두집 아들이었던 정훈이와 미장원집 아들이었던 인수가 내 손을 잡고 유씨 할머니의 구멍가게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며 그들에게 난 누군가 다른 사람으로 보일 것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들에게 나를 알려야 할 것인가, 그저 모른척 지나갈 것인가가 아니라, 일단 내가 누구인가에 있었다.
"너 새로 이사왔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나도 모르는 누군가 새로운 사람으로 보이고 있었고, 최소한 그들은 나에게 적대감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어, 어. 나 새로 이사왔어. 저기 언덕 위에 파란 지붕인 집으로..."
대충 둘러대기는 했지만, 분명히 그 집엔 내가 기억하기로 사람이 드나드는 법이 없었다. 순간적인 반응치고는 꽤나 쓸만한 것이었다고나 할까.
"이야, 그 파란 지붕 집이구나. 올라다니기 힘들겠다."
"그, 그런가? 난 워낙 그렇게 높이 있는 집에만 살아서..."
"우와, 그럼 넌 걷는게 하나도 안 힘들어?"
"달리기 진짜 잘하겠다."
"달리기랑 무슨 상관이냐. 넌 나중에 에레베스트, 에베레스튼가, 하여튼 그 산 올라가면 되겠다."
"그, 그래."
"나도 에베레스트에 꼭 가보고 싶은데."
그 시절의 내가 에베레스트에 가고 싶었는지 그때서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내가 내 입으로 내 머리 속에 들어있는 에베레스트에 대한 소망을 이야기하는데 어쩜 그리 이질적일 수가 있는 것인지.
"에베레스트엔 왜 가고 싶은데?"
"그러니까, 에베레스트에 올라가면 하늘에 뿌린 물감을 퍼올 수 있을 것 같아서. 미술 시간에 그림을 그려도 파란 하늘만은 내 마음대로 그려지지가 않아. 그래서."
"파란 하늘?"
"어, 하늘. 저 하늘색은 내 물감엔 없어. 이름도 모르겠고. 그래서 직접 가서 떠올려고."
"하늘은 물감으로 되어있는 거야?"
"아닌가? 난 그런줄 알았는데. 아니야?"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데. 아, 내가 들은 이야기가 있어."
"뭔데?"

 

하늘은 원래는 파란색이 아니었데. 흰색이었다는 거야. 생각해봐. 밤의 하늘은 까만색이잖아. 그래서 밤의 반대인 낮의 하늘은 하얀색이었데. 하얀색 하늘은 떼가 잘 타긴 했지만, 그래도 하늘에는 그 하얀 하늘은 언제나 깨끗하게 닦아주는 청소부가 있어서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는거야. 다행스런 일이지.
그러던 어느날 세상 사람들을 괴롭히던 푸른 괴물이 이 청소부를 잡아갔다나봐. 깨끗한 하늘을 볼 수 없게 하려고 그랬겠지.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하늘은 점점 지저분해져 가다가 결국엔 낮이랑 밤이 구분 안될 정도로 까맣게 떼가 묻었데. 사람들은 걱정만 하다가 결국엔 그 파란 괴물을 물리치고 청소부를 데려올 용사를 찾았고, 바다 건너 먼 섬에 사는 한 청년이 자원했다나봐. 그 청년은 사람들이 만들어준 날개를 달고 하늘로 날아가서는 푸른 괴물이 숨어있던 까만 동굴 속으로 들어가서 단칼에 괴물의 목을 베고 청소부를 구했지. 그런데 푸른 괴물은 죽어 가면서 마지막 힘을 다해 청소부를 낚아챘고, 괴물의 손아귀에 잡힌 청소부는 숨이 막혀 죽었다는 것이야. 그때 괴물이 흘린 피가 하늘에 온통 뿌려져서 하늘은 파란 색으로 변했데. 그리고 청소부의 빈 자리는 그 청년이 대신 했고. 그런데 청년은 청소에 서툴러서 가끔씩 지저분한 떼자국을 남기기도 했는데 그게 구름이래.


"우와, 그런거야?"
"그럼 하늘에 있는 파란색은 물감이 아니라 괴물의 피네?"
"글쎄, 나도 들은 얘기니까. 그러면 니가 나중에 어른이 되서 에베레스트에 올라갔을 때 확인해 줄래?"
"그래. 그럴께. 내가 꼭 피인지, 물감인지 알아봐줄께."
"고마워."





"베이스캠프, 베이스캠프, 여기는 E1, 들리나?"
"E1, E1, 여기는 베이스캠프, 아주 잘 들린다."
"베이스캠프, 바람도 없고 오늘은 정상까지 올라가겠다."
"E1, 그래도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조심하기 바란다."
"롸저."
하늘의 파란 색은 물감일까, 푸른 괴물의 피일까. 모범답안이 무엇인지는 이미 아주 오래 전에 알아 버렸다. 빛과 물질들의 산란 작용에 의해서 생긴 현상일 뿐이다. 하늘의 어디에도 피는 커녕 물감의 흔적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이곳의 정상에 있는 저 하늘만은 컵으로 잘 떠서 담아 올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그게 물감이었던, 파란 괴물의 피가 되었던.




'오늘따라 잘 닦아 놨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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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04 11:39 2006/08/04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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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other day] 5. 사인, 싸인
2006/08/04 11:25 | anakin wonderland/another day | Permanent link

5. 사인, 싸인

 

 

진호의 사인은 질식이었다. 담수에 빠진 시체가 다 그렇듯이 진호의 시체는 심하게 팽창해 있었다. 진호라는 사실은 그의 뒷 주머니에서 나온 지갑의 운전명허증만이 말해줄 뿐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사체를 확인하며 오열했다.

이틀만에 돌아온 집에서 그녀를 기다린 것은 자동응답기에 남아있던 경찰의 건조한 목소리뿐이었다. 한 사람의 죽음은 겨우 그런 정도의 여운만을 남길 뿐이다. 그 이상을 기대하는 것은 욕심이다.

"김수정씨 본인이십니까?"

"예."

"이진호군과는 어떤 관계이십니까?"

"아들입니다."

"예. 다 끝났습니다. 여기 서명하시고..."

수정은 조용히 서명했다. 안치실에서 십년치의 눈물을 쏟아버린 탓에 더 울 수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남 모르는 사람 앞에서 우는 일은 더이상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남 모르는 사람의 울음을 지켜보는 쪽도 수월한 일은 아니겠지만.

"저기..."

"김경장이라고 부르세요. 뭐 다른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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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제일 cool한 그녀와 나
2006/07/28 09:12 | anakin wonderland | Permanent link
세상에서 제일 cool한 그녀와 나
 
 
 
그녀를 만난건 아직 내가 말을 하기도 전의 아주 오래된 예전의 일이다. 그녀의 엄마와 우리 엄마는 친구였고, 그러니까 나와 그녀는 어머니들끼리의 인연으로 만난 그렇고 그런 소꼽친구인 셈이다. 어디 만화 같은 데에서나 등장할만한 허무맹랑하고 말도 안되는 부모님들끼리의 약속으로 맺어진 그런 커플 같은건 절대 아니다. 그저 그녀와 난 어머니들끼리의 인연으로 만난 사이라는 점을 강조하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설명이 없을 것 같아서 그렇게 설명한 것뿐이지, 절대로 그녀와 나는 누구의 조작도 없는 그런 사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어이, 한진우, 너 많이 컸다."
"가만히 있는 사람한테 왜 또 시비야?"
그녀는 언제나 그런 식이다. 내가 싫어하는줄 알면서도 나를 한수 아래로 깔고 쳐다본다. 난 그녀, 아니 그 녀석이 그따위로 대하는 눈초리부터 말투까지 하나도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다. 저런 여자애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해줄 녀석이 누구인지 정말 궁금하고 때로는 불쌍할 뿐이다. 녀석은 분명히 누군가에게는 본질을 숨긴채 어엿한 여자인척 연기를 할테니 말이다.
"너 우리반 정유진이 좋아한다더라. 정유진이도 눈이 뼜지. 어떻게 이렇게 허여멀겋고 남자다운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런 놈을 좋아하는건지."
"그건 니가 상관할 바 아니고."
"그렇긴 하지만, 하여튼 이거나 받아라. 정유진이 너 주라더라."
녀석이 전해준건 편지였다. 정유진이 썼다는 하늘색 봉투에 담긴 편지. 어쩐 일인지 그렇게 내키지 않는 편지였지만, 그래도 쓴 사람의 성의라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 나라도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편지를 쓸테고, 그 편지가 업수이 여김을 당한다면 가슴이 아플테니 싫은 내색은 하지 말아야지 싶었다.
"너 정유진 별로냐?"
녀석은 잘도 내 마음을 꽤뚫어본다.
"글쎄. 난 아직 여자를 만나서 뭘 할 수 있는지 모르니까."
"하긴 너처럼 어린 애가 뭘 알겠냐."
"그래서 넌 뭘 좀 알고 하는 소리냐?"
"나야..."
녀석이 말을 흐린다. 아마도 지난주에 헤어진 그 예전 과외선생때문에 그런 것일지도. 뭐 나랑은 전혀 상관 없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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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28 09:12 2006/07/28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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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other day] 4. 백팩, 의암호
2006/07/04 20:11 | anakin wonderland/another day | Permanent link

4. 백팩, 의암호

 

 

 

진호는 기차에 오른다. 모자를 깊게 놀러쓰고 백팩을 맨 모습은 집을 떠날 때의 모습과 다르다. 아마도 집에 다시 들어간 이유는 모자를 쓰고, 그 커다란 백팩을 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진호의 엄마가 알고있는 진호의 목적지도 이곳은 아닐 것이다.

디젤 기관차는 하얀 연기를 뿜거나 하지 않는다. 은하철도 999가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테쓰로도 메텔도 진호의 옆자리를 지키고 있지는 않다. 열자엔 그저 그런 누군가가 가득 있을 뿐이다. 당연히 하늘을 날아오르는 일도 없다. 이곳은 춘천행 무궁화호인 것이다.

 

진호는 의암호 앞에 서있다. 조금만 더 일찍 왔더라면 물안개 가득한 의암호를 봤을텐데, 물안개는 커녕 하늘엔 구름마저 없다. 너무 맑아서 서글퍼지는 날.

 

모자가 물 위에 떠오른다. 백팩은 호숫가에서 주인을 기다린다. 주인은 보이지 않는다. 주인을 찾지도 않는다.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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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04 20:11 2006/07/04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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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other day] 3. 식사, 귀가
2006/07/02 14:51 | anakin wonderland/another day | Permanent link

3. 식사, 귀가

 

 

 

"진호야, 아침 먹어야지?"

진호를 깨운건 자명종 소리보다 열배는 더 클 것 같은 엄마의 목소리다. 창밖으로 이미 오래 전에 떠오른 것 같은 해가 진호를 괴롭힌다.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진호의 주변을 가득 채웠다.

"오늘은 못 들어올 것 같아. 일본에서 일이 있다고 해서..."

그녀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했는지 알아 보기 쉬운 표정을 찾을 수는 없다. 진호는 여전히 무표정하다. 두 사람의 식사도 공허하긴 마찬가지다.

 

모자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집을 떠난다. 진호는 그녀의 차가 떠나고 한참이 지나서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두고 간 물건이 생각난 것인지, 혹은 완전히 귀가한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문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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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02 14:51 2006/07/02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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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other day] 2. 우레탄 트랙, 찌게, レベル
2006/06/22 17:38 | anakin wonderland/another day | Permanent link

2. 우레탄 트랙, 찌게, レベル

 

 

그는 지금 달리고 있다. 어지간한 운동장에선 볼 수 없는 고급 우레탄이 잘 깔린 트랙이다. 그렇다고 육상선수들이 기록을 위해서 달릴 법한 트랙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자갈과 먼지로만 조성되어 있는 운동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도 어쨌든 그의 조깅화와 궁합이 잘 맞았는지, 달리는 데에 부담이 없어 보인다. 그는 마치 칼루이스처럼 뛰고 있다.

걀승점을 통과한 그는 한참을 숨을 고른다. 가슴에 맺힌 땀이 그의 조깅 수트에 스며들었다. 마침 불어온 바람이 그 마저도 날려버려 상쾌한 기분이 들기에 충분했다. 그래서인지 어째서인지 그는 트랙에 눕는다. 구름 한점 없는 하늘을 바라본다, 눈이 부셨는지 이내 눈을 감는다.

"멋진 피니쉬였어. 반해버렸다니까."

그의 눈은 그녀의 목소리를 쫓는다. 그러나 어디에도 그녀는 보이지 않는다. 다시 눈을 감는다. 구름이 물려와 그늘을 만들어 주어 한결 상쾌해졌다. 그대로 잠들고 싶은 그런 오후의 한 조각이 그를 감싼다.

몇시간이나 흘러서야 그는 일어선다. 툭툭 먼지를 떨어내는 모습에 피곤이 서려있다. 잠이 덜 깬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비가 오겠네."

비가 오면 안될 것 같은 그의 목소리가 운동장으로 퍼져 나간다. 운동장엔 아직도 인적이 없다.

 

"다녀왔습니다."

신발을 벗으며 거실을 향해 말을 했지만 대답은 없다. 실망의 기분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도 대답을 기대하진 않았던 것 같다. 그의 목소리가 메아리쳐 다시 돌아올 것만 같은 공허함만이 이 공간을 채우고 있다.

'찌게는 데워서 먹으렴.'

식탁에는 정갈하게 차려진 음식과 그의 어머니가 써놓은 듯한 메모만이 자리를 채우고 있다. 반찬이 담겨있는 접시들의 랩을 벗기고, 냉장고의 물병을 꺼내고, 숟가락과 젓가락을 찾아 자리에 앉았다. 찌게는 데우지 않았다.

혼자 하는 식사는 공허하다. 그의 입에서 철저하게 분해되어 가는 음식들의 비명들만이 공간을 가른다. 그는 무표정으로 음식들을 협박하고, 야무지개 그들의 일생을 마감시킨다. 그로서 음식들의 소명은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그에게서 소명에 대한 감사나 어떠한 감상이 표현되지는 않는다. 최소한의 고마움마저도 소멸되어 버린 의식이 진행될 뿐이다. 정확히 10분 27초가 소요된 의식이었다.

 

식사를 마친 그는 거실로 나간다. 리모콘을 들고 제일 윗 줄의 빨간 버튼을 눌러 TV를 부활시킨다. 지금 그는 이 공간의 지배자, TV는 그를 위한 아첨을 시작한다. 온갖 재미난 이야기와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그에게 상납한다. 그는 역시 무표정하게 TV 속의 상납을 소비해버린다. 역시 어떠한 감상도 없는 의식의 연속, 시간은 그렇게 흘러갈 뿐이다.

그가 눈을 떴을 때 이미 해는 졌고, 거실은 어둠과 그 어둠을 이기려는 TV의 투쟁으로 엉망진창이었다. 그 싸움의 종말은 역시나 그의 손으로 결판났다. 무승부, 거실의 형광등을 켜자 어둠은 물러갔지만, TV의 불빛도 그 힘이 약해질 수 밖에 없다. 그의 앞에선 모두가 어린 양.

시계는 10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둠을 봐서 밤 10시 30분일 것이다. 그가 그렇게 오래 잠들지는 않았던 것도 확실하다. 그러나 그 시각에도 그 공간에는 그 혼자만이 남아있다.

"엄마 왔다. 진호 자니?"

그의 이름은 진호다. 그도 신의 하나의 피조물일뿐 어떠한 신도 아니다. 그 공간의 신도 그는 아니다. 그는 진호라는 기호로 해석이 가능한 피조물일 뿐이다.

"찌게는 데워 먹었니?"

"설겆이는 대충 해놨어요."

"고맙다, 엄마는 피곤해서 씻고 바로 잘께. 너도 바로 자라."

모자의 대화는 채 1분을 이어가지 못했다. 그들의 공통 관심사는 어디에도 없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진호는 TV를 끄고 그의 방으로 보이는 새로운 공간으로 숨어들어가고, 그의 엄마는 그녀의 방으로 피신한다. 대화종료.

 

진호는 침대에 누워 이번에는 거실의 리모콘보다 조금 더 복잡한 리모콘을 집어들었다. 음악 소리가 크다. 아마도 패닉의 음악인 것 같다. 이적의 목소리가 조그만 스피커를 타고 공간을 가득 채운다.

"담배 한개피와 녹는 아이스크림..."

진호는 다시 방을 나선다.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꺼내 방으로 돌아왔다. 아마도 노래 가사가 그를 자극한 듯 하다. 그러나 담배는 없다. 담배의 부재는 진호의 무표정으로 대체되었다. 담배 연기만큼이나 매캐한 무표정이 진호 얼굴에 가득 찬다.

음악이 멎었다. 진호는 침대에서 내려와 거실의 TV보다 작은 TV 앞에 가부좌를 튼다. 손에 꼭 들어갈만한 작은 무언가를 들고 TV를 튼다. 그리고 TV에서 보여주는 다른 세계의 영웅이 된다.

'アナキンを レベル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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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22 17:38 2006/06/22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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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other day] 1. 지각, 비겁, 싸구려
2006/06/15 17:08 | anakin wonderland/another day | Permanent link

1. 지각, 비겁, 싸구려

 

 

시계를 봤다.

2시 50분 21초, 22초, 23초...

시간이 흐르는 것을 확인하자 담배가 피고 싶어졌다. 그애는 침대에서 담배를 피는 습관을 매우 혐오스러워 했다.

"여긴 잠을 자는 곳이라고. 잠은 휴식이야. 다른 사람의 휴식을 방해하는 행동이 아무렇지도 않게 용납되는 공간이 아니란 말야. 그렇게 담배를 피고 싶거든 조금이라도 침대에서 벗어나는게 어때? 너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잖아."

어디에도 없는 논리만큼이나, 당연한 논리였다. 논리에 대한 항거는 언제나 패배뿐이다. 게다가 상대는 그애였다.

라이터 불이 공간을 채운다. 담배가 타들어가는 소리, 첫 한 모금 만큼의 연기, 마침 돌아가는 에어컨의 실외기 소리가 방안에 가득 찼다. 침대에 누워있지만, 더이상 그애의 논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모든 것이 남아 있지만, 그애만 남아있지 않다.

담배를 피우는 시간은 대게 5분 정도가 걸린다. 물론 필터의 가장 가까운 곳까지 열심히 피웠을 때에나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시계를 볼 필요도 없이 5분의 시간이 흘렀을 것이다. 5분의 의미란 그런거다. 대중가요의 한 트랙보다는 길지만, 담배를 피우기엔 적당한 시간이 5분이다. 또 그애의 빈자리를 새삼 느끼기에도 충분한.

 

9시가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각이다.

"이정현입니다. 반차 쓰겠습니다."

상대방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이 끊어버렸다. 들을 가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들을 용기도 없었던 것이다. 비겁하다.

기왕 늦게 되었다고 생각이 들면 오히려 여유로워진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전체 학기의 삼분의 일을 결석하면 자동으로 F를 주는 시스템이었다. 고로 결석을 많이 하게 되면 기말고사 기간이 여유로워지는 것이다. 어짜피 F니까. 실패가 확실할 수록 두려움은 없어지는 법인게다. 문제는 그 순간을 어떻게 보내는가에 있는 것이다. 기왕 얻은 여유라면 유용하게 쓰는 쪽이 개인으로 보나 인류로 보나 타당하다. 현관문을 열고 신문을 짚어든 이유였다.

타당한 행동의 또다른 범주엔 먹는 일도 빼놓을 수 없다. 냉장고를 열어 젖힌 이유는 단지 공복감만은 아닌 것이다. 문제는 허전한 내 위만큼이나 냉장고도 공복이었다는 것이었다.

신문을 읽는둥 마는둥던져두고 샤워를 했다. 평소대로였다면 거실의 스테레오를 크게 틀어놓고 욕실문을 활짝 열고 샤워를 했겠지만, 어쩐 일인지 음악을 듣고 싶은 마음이 생기질 않았다. 그렇다고 떨어지는 물 아래에서 명상을 하고 싶었던 것도 아니다. 그저 귀찮았던 것이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문제들이 귀찮음으로 인하여 발생하고 해결되었던가. 분명 샤워기의 저 모양도 귀찮음에서 기인한 것일게다. 물론 정답은 아니다.

샤워를 마치고 어제 세탁소에서 찾아온 폴스튜어트의 옥스퍼드 셔츠를 입었다. 셔츠는 누가 뭐라해도 순면의 옥스퍼드가 제일이라고 누군가 이야기해 주었던 기억이 잠시 스친다. 그런식의 편견들은 결국 비합리적인 행동을 양산하고 만다. 옷장에 걸린 똑같은 몇벌의 셔츠들이 말해주듯이.

어제 입었던 수트를 다시 입고, 타이를 집어든 채로 차에 올랐다. 아직 10시가 되지 않은 시간. 반차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뭔가 먹으려면 나가는 수밖엔 없었다. 그 역시 안타깝다.

 

사무실에 들어선 시각은 11시 40분 경이었다. 이쪽의 시매스터가 표준시가 아니기 때문에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없다는 것이 정답이기도 했지만, 사무실의 스케쥴을 정해주는 시계엔 눈금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모두에게 합당하게 받아들여진 나의 출근 시각은 11시 40분 경인 것이다.

"이과장, 어제 얘기한 제안서는 언제까지 가능하지?"

팀장은 마치 내 지각을 너그럽게 용서하고 있다는 듯한 눈초리로 이야기를 건넨다. 악의가 없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어쩐지 그런 태도가 더 힘들게 한다.

"어제 다 끝냈습니다. 확인하고 바로 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다시 정적. 자리에 가서 앉으라는 신호, 서로에 대한 무관심.

"과장님 왜 늦으셨어요?"

옆자리의 김대리가 메신저로 물어왔다. 옆자리라면 옆자리다운 커뮤니케이션이 있을텐데, 그와 나 사이엔 우주가 존재하는 것 같다. 휴스턴, 응답하라.

"어제 야근을 해서 그랬나."

"퇴근은 언제?"

"1시 정도..."

"아이고..."

팀장에게 메일을 보내기가 무섭게 다들 식사를 하러 나간다. 사무실은 역삼역을 지난 2호선 마냥 텅 비었다.

 

아침을 늦게 먹은 이유도 있었지만, 출근한지 20분만에 또 나가기도 싫었다. 그렇게 사무실엔 나 혼자만 남았다. 혼자만의 사무실. 담배를 꺼내 물었다가 이내 내려 놓았다. 1시간의 여유가 있었지만, 담배 냄새가 빠지기엔 충분하지 못한 시간이었다. 결국 끽연실로 이동.

우유가 들어간 커피는 싫었지만, 자판기 커피 외엔 별다른 대안이 없었다. 사실 자판기 커피에 우유가 들어있지도 않다. 그것은 우유를 대체한 뭔가 다른 것일뿐이다. 자판기가 토해내는 커피를 들고 끽연실의 싸구려 소파에 앉았다. 어쩌면 내 거실의 소파보다 고급 소파일는지도 모르지만, 어쩐지 그런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한번 싸구려 소파라고 인식이 되면 그것은 영락없는 싸구려 소파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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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15 17:08 2006/06/15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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